국궁 일번지 황학정
국궁지식
黃鶴亭記(황학정기)
작성자
황학정
작성일
2022-12-11 12:05
조회
545
(註)黃鶴亭記(주)황학정기는 1928년 처음으로 亭(정)의 역사를 기술, 목판에 새긴 현판을 만들어 정자 안에 걸어 놓았던 것인데 6·25전란중에 소실되었다.
이번에 다행히 현판의 拓本(탁본)이 발견되어 全文(전문)을 소개한다. <權容弼권용필>
黃鶴亭記(황학정기)
일찍이 듣건대 學問(학문)에는 淵源(연원)이 있고 藝技(예기)에 系統(계통)이 있으며 事物(사물)에는 本末(본말)이 있다고 한다. 學問(학문)이 消滅(소멸)되었다 다시 자라는 것은 그것이 貴(귀)하여 淵源(연원)이 끊기지 않음이요 藝技(예기)가 盛衰(성쇠)하며 이어지는 것은 그것이 貴(귀)하여 系統(계통)을 잃지 않음이며 事物(사물)의 沿革(연혁)이 貴(귀)하여 그 本末(본말)이 잊혀지지 않은 것은 千古(천고)의 通義(통의)요 百世(백세)의 成事(성사)이다. 한 사람이나 한 집안의 일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할 진대 하물며 많은 선비들이 揖讓(읍양)하며 構禮(구례)하는 것을 견주어 볼 때 이를 疏忽(소홀)히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멀리 돌아보건데 임진왜란 후에 宣祖(선조)께서 나라를 中興(중흥)할때 백가지 病弊(병폐)해진 것을 모두 重新(중신)하면서 軍務(군무)와 轅門(원문)(兵營병영)을 크게 桶修(통수)하고 武士 外(무사 외)에도 民間(민간)의 俊秀(준수)한 子弟(자제)에게 射藝(사예)를 익히게 하여 첫째로는 이로써 신체를 기르고 한편으로는 武氣(무기)를 崇尙(숭상)케 하고 하였는데 前日(전일)에 射藝(사예)를 익히던 亭臺(정대)가 모두 兵火(병화)로 完全(완전)히 灰燼(회진)되어 없어진 故(고)로 임금께서 景福宮 建春門(경복궁 건춘문) 안쪽의 廣大(광대)한 園囿(원유)(동산)를 특별히 下賜(하사)하여 射亭(사정)을 新築(신축)케 하고 이름을 五雲亭(오운정)이라 命(명)한 다음 百姓(백성)도 들어와 射藝(사예)를 겨루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체력을 기를 마음을 가진 사람과 武學(무학)에 뜻이 있는 선비가 到處(도처)에서 踵起(종기)(계속 일어남)하여 일어나 射擅(사천)과 射臺(사대)를 베풀고 쌓은 것이 서로 바라보일 정도로 많아지게 되었다. 그렇게 수백년 동안 내려오는 가운데 가장 먼저 創立(창립)한 射亭(사정)이 仁旺山 西南(인왕산 서남쪽) 산기슭의 樓閣洞(누각동)에 있었으니 암벽에큰 글씨로 刻銘(각명)하기를 白虎亭(백호정)이라 하였고 오늘에 이르도록 그 字劃(자획)이 오히려 분명하고 굳세다.
그런데 純祖 七年(순조 칠년(1807)) 여름에 嚴先師 漢鵬(엄선사 한붕)이 여러 사람과 더불어 白虎亭(백호정)의 터가 좁고 깊으니 새로 亭(정)을 세우기로 議論(의논)하고그 옆의 넓은 山麓(산록)에 新築(신축)하여 이름을 고쳐 가로되 風虎亭(풍호정)이라 하였다.
그 다음으로 세워진 것이 仁旺山(인왕산) 아래 弼雲洞(필운동)의 登科亭(등과정) 다음은 社稷洞(사직동)의 大松亭(대송정) 다음은 白岳山(백악산)아래 三淸洞(삼청동)의 雲龍亭(운용정)인데 이 五亭(오정)이 곧 世上(세상)에서 이르는 바 西村(서촌)의 五處射亭(오처사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老師(노사)와 宿武(숙무)들이 五雲亭(오운정)에 雲集(운집)(많이 모임)하여 성황을 이루던 시절만 같지 못하였다. 高宗 三年(고종 삼년(乙丑을축))봄에 이르러 景福宮(경복궁)을 重修(중수)함에 따라 五雲亭(오운정)이 紫禁 中(자금 중)에 있었던 관계로 廢撤(폐철)되자 이로부터 風嘯亭(풍소정)등 五亭(오정)이 각각 亭旗(정기)를 세우고 藝技(예기)를 겨루게 되었다.
高宗 三十一年(고종 삼십일년(1894)) 이래 산하에 사변이 많아 군무 행정 또한 개혁되니 종전에 장교들이 무예로 궁술을 익히던 일이 총포 사격술로 전환함으로 말미암아 군문에서는 弓射(궁사)가 一掃(일소)한 듯 폐지되고 오직 남은 것은 민간에서 體育(체육)용으로 쓰는 角弓(각궁)과 柳葉箭(유엽전)일 뿐이였다. 일이 이같이 된 고로 사방지역 안에 서로 보일 만큼 많던 射亭(사정)들이 靡然(미연(자연적으로 흩어지고 쓰러짐))히 사라져 남은 것이 없고 오직 風嘯亭(풍소정) 하나만이 歸然(귀연)히 독립해 있게 되자 다른 四個亭(사개정)의 인사들이 물유 같이 모여 들어 마치 흩어졌던 가족이 다시 한자리로 합친 것과 같이 되어 근근이 遣風(유풍)을 保存(보존)하기에 이르었다.
오호라 궁사가 비록 한 가지 藝技(예기)라 하지만 하나의 道(도)로서 自古以來(자고이래) 순환되어 왔거늘 그렇게 사라져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으랴. 高宗 光武 三年(고종 광무 삼년(1899))에 궁예를 장려하여 신체를 발육시키라는 綸音(윤음(임금이 지시함))이 내리니 이에 따라서 先師(선사)의 후예와 宿武(숙무(훌륭한 무사))의 자손이 同聲(동성)으로 상응하여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慶熙宮(경희궁) 북쪽 산록에 一亭(일정)을 건축하고 扁額(편액(현판))을 揭縣(게현(높이달음))하여 가로되 黃鶴亭(황학정)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 멀리 헤아려 거행하는 의리를 취함과 더불어 射候(사후(포장과녁))의 黃鵠(황학)을 적중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亭閣(정각)을 結構(결구)한 것의 軒敞(헌창)함과 사용한 木石(목석)의 精緻(정치)함은 옛날의 各射亭(각사정)들에 가히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로부터 재물을 모아 계를 만들고 朔會(삭회)를 가져 기예를 시험하여 갑·을로 評考(평고)하며 그윽한 정서를 화창히 펼치면서 첫째로 선인의 유훈을 준수하고 별도로 射亭規約(사정규약)을 정하여 服務(복무)할 任員(임원)을 선임하여서 모든 亭事(정사)를 禮(예)를 지켜서 선처하도록 하고 射藝(사예)를 익힘을 날로 進展(진전)케하니 크게 볼만한 것이 있게 되었다. 그 얼마나 장한 노릇인가? 그런데 1922년 여름에 뜻하지 않았던 일로 인하여 亭(정)을 인왕산 아래 등과정 옛터로 移建(이건)하였으니 이것이 오늘의 우리 黃鶴亭(황학정)이다. 돌이켜 보건대 나라 안에 그 많았던 射亭(사정)들이 갑오경장 이후 하나같이 空潑(공발)되었거늘 당시의 群賢(군현)이 어찌 동감으로 오직 우리 亭(정)만이 홀로 먼저 중흥되어 翼然(익연)히 설 것을 기약하였을 것인가?
斯道(사도)가 거의 전멸되는 날을 맞아 저 五雲亭(오운정) 이하 다섯 射亭(사정)의 계통이 일시에 風嘯亭(풍소정) 하나로 叢翠(총취(다모임)) 되었으며 또한 이때에 風嘯亭(풍소정)마저도 廢亭(폐정)되려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우리 정이 이를 계승하여 궐기하였으니 어찌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재주도 없으면서 射友(사우)들의 뒤를 追隨(추수)해 다니다가 갑신년 여름에 등룡정에 入射(입사)한 이래 사계에서 세월을 보내며 몸으로 겪은 일이란 게 족히 枚擧(매거)할 만한 것이 없는 처지이거니와 이 亭(정)에서 從事(종사)한 지가 또한 居然(거연) 30년에 이르렀는데 요행으로 諸君子(제군자)의 寄託(기탁)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白壽(백수)의 나이에 이르러 허물을 얻는 바를 면할 수 있게 된 것을 그저 마음속으로 自慰(자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금 늙은 버드나무에 꿈치가 생기고 霧花(무화)가 눈앞을 어지럽혀 장차 활을 접어 벽상에 걸고 들창문 아래에서 병을 요양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스러운 바인데 혹시 후래의 群英(군영)으로서 이 亭(정)에 오르는 이들이 우리亭(정)의 연혁과 더불어 무릇 인사들에게 있어 학문의 연원과 藝技(예기)의 계통이 이와 같이 심원함을 깊이 살필 겨를이 없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고 또한 우리의 先師諸公(선사제공)이 腐心(부심)하며 授受(수수)한 도리가 오로지 沿革(연혁)의 끝에서 그 근성을 잊지 아니하고 소멸되고 자람에 성하고 衰落(쇠락)하는 사이에서 그 源統(원통)을 잃지 아니하는 데에 두고 있었으므로 斯界(사계)에 오늘이 있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고로 스스로 외람되고 고루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옛 소문과 목격한 바 大槪(대개)를 略述(약술)하여 傳誦(전송)할 따름인데 이를 輪奐(윤환)히 保守(보수)하고 더욱 빛나게 하며 예술이 興(흥)하여 일어나 接武(접무(궁사들이 연접하여 이어짐))하듯 발길이 이어지고 계속하여 찾아오는 士君子(사군자)로 촉망이 무궁케 된다면 두려움이 없겠다.
戊辰年(무진년(1928年년)) 菊月 下浣(국월 하완)
昌寧后人 成 文 永 識(창녕후인 성 문 영 지)
이번에 다행히 현판의 拓本(탁본)이 발견되어 全文(전문)을 소개한다. <權容弼권용필>
黃鶴亭記(황학정기)
일찍이 듣건대 學問(학문)에는 淵源(연원)이 있고 藝技(예기)에 系統(계통)이 있으며 事物(사물)에는 本末(본말)이 있다고 한다. 學問(학문)이 消滅(소멸)되었다 다시 자라는 것은 그것이 貴(귀)하여 淵源(연원)이 끊기지 않음이요 藝技(예기)가 盛衰(성쇠)하며 이어지는 것은 그것이 貴(귀)하여 系統(계통)을 잃지 않음이며 事物(사물)의 沿革(연혁)이 貴(귀)하여 그 本末(본말)이 잊혀지지 않은 것은 千古(천고)의 通義(통의)요 百世(백세)의 成事(성사)이다. 한 사람이나 한 집안의 일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할 진대 하물며 많은 선비들이 揖讓(읍양)하며 構禮(구례)하는 것을 견주어 볼 때 이를 疏忽(소홀)히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멀리 돌아보건데 임진왜란 후에 宣祖(선조)께서 나라를 中興(중흥)할때 백가지 病弊(병폐)해진 것을 모두 重新(중신)하면서 軍務(군무)와 轅門(원문)(兵營병영)을 크게 桶修(통수)하고 武士 外(무사 외)에도 民間(민간)의 俊秀(준수)한 子弟(자제)에게 射藝(사예)를 익히게 하여 첫째로는 이로써 신체를 기르고 한편으로는 武氣(무기)를 崇尙(숭상)케 하고 하였는데 前日(전일)에 射藝(사예)를 익히던 亭臺(정대)가 모두 兵火(병화)로 完全(완전)히 灰燼(회진)되어 없어진 故(고)로 임금께서 景福宮 建春門(경복궁 건춘문) 안쪽의 廣大(광대)한 園囿(원유)(동산)를 특별히 下賜(하사)하여 射亭(사정)을 新築(신축)케 하고 이름을 五雲亭(오운정)이라 命(명)한 다음 百姓(백성)도 들어와 射藝(사예)를 겨루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체력을 기를 마음을 가진 사람과 武學(무학)에 뜻이 있는 선비가 到處(도처)에서 踵起(종기)(계속 일어남)하여 일어나 射擅(사천)과 射臺(사대)를 베풀고 쌓은 것이 서로 바라보일 정도로 많아지게 되었다. 그렇게 수백년 동안 내려오는 가운데 가장 먼저 創立(창립)한 射亭(사정)이 仁旺山 西南(인왕산 서남쪽) 산기슭의 樓閣洞(누각동)에 있었으니 암벽에큰 글씨로 刻銘(각명)하기를 白虎亭(백호정)이라 하였고 오늘에 이르도록 그 字劃(자획)이 오히려 분명하고 굳세다.
그런데 純祖 七年(순조 칠년(1807)) 여름에 嚴先師 漢鵬(엄선사 한붕)이 여러 사람과 더불어 白虎亭(백호정)의 터가 좁고 깊으니 새로 亭(정)을 세우기로 議論(의논)하고그 옆의 넓은 山麓(산록)에 新築(신축)하여 이름을 고쳐 가로되 風虎亭(풍호정)이라 하였다.
그 다음으로 세워진 것이 仁旺山(인왕산) 아래 弼雲洞(필운동)의 登科亭(등과정) 다음은 社稷洞(사직동)의 大松亭(대송정) 다음은 白岳山(백악산)아래 三淸洞(삼청동)의 雲龍亭(운용정)인데 이 五亭(오정)이 곧 世上(세상)에서 이르는 바 西村(서촌)의 五處射亭(오처사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老師(노사)와 宿武(숙무)들이 五雲亭(오운정)에 雲集(운집)(많이 모임)하여 성황을 이루던 시절만 같지 못하였다. 高宗 三年(고종 삼년(乙丑을축))봄에 이르러 景福宮(경복궁)을 重修(중수)함에 따라 五雲亭(오운정)이 紫禁 中(자금 중)에 있었던 관계로 廢撤(폐철)되자 이로부터 風嘯亭(풍소정)등 五亭(오정)이 각각 亭旗(정기)를 세우고 藝技(예기)를 겨루게 되었다.
高宗 三十一年(고종 삼십일년(1894)) 이래 산하에 사변이 많아 군무 행정 또한 개혁되니 종전에 장교들이 무예로 궁술을 익히던 일이 총포 사격술로 전환함으로 말미암아 군문에서는 弓射(궁사)가 一掃(일소)한 듯 폐지되고 오직 남은 것은 민간에서 體育(체육)용으로 쓰는 角弓(각궁)과 柳葉箭(유엽전)일 뿐이였다. 일이 이같이 된 고로 사방지역 안에 서로 보일 만큼 많던 射亭(사정)들이 靡然(미연(자연적으로 흩어지고 쓰러짐))히 사라져 남은 것이 없고 오직 風嘯亭(풍소정) 하나만이 歸然(귀연)히 독립해 있게 되자 다른 四個亭(사개정)의 인사들이 물유 같이 모여 들어 마치 흩어졌던 가족이 다시 한자리로 합친 것과 같이 되어 근근이 遣風(유풍)을 保存(보존)하기에 이르었다.
오호라 궁사가 비록 한 가지 藝技(예기)라 하지만 하나의 道(도)로서 自古以來(자고이래) 순환되어 왔거늘 그렇게 사라져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으랴. 高宗 光武 三年(고종 광무 삼년(1899))에 궁예를 장려하여 신체를 발육시키라는 綸音(윤음(임금이 지시함))이 내리니 이에 따라서 先師(선사)의 후예와 宿武(숙무(훌륭한 무사))의 자손이 同聲(동성)으로 상응하여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慶熙宮(경희궁) 북쪽 산록에 一亭(일정)을 건축하고 扁額(편액(현판))을 揭縣(게현(높이달음))하여 가로되 黃鶴亭(황학정)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 멀리 헤아려 거행하는 의리를 취함과 더불어 射候(사후(포장과녁))의 黃鵠(황학)을 적중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亭閣(정각)을 結構(결구)한 것의 軒敞(헌창)함과 사용한 木石(목석)의 精緻(정치)함은 옛날의 各射亭(각사정)들에 가히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로부터 재물을 모아 계를 만들고 朔會(삭회)를 가져 기예를 시험하여 갑·을로 評考(평고)하며 그윽한 정서를 화창히 펼치면서 첫째로 선인의 유훈을 준수하고 별도로 射亭規約(사정규약)을 정하여 服務(복무)할 任員(임원)을 선임하여서 모든 亭事(정사)를 禮(예)를 지켜서 선처하도록 하고 射藝(사예)를 익힘을 날로 進展(진전)케하니 크게 볼만한 것이 있게 되었다. 그 얼마나 장한 노릇인가? 그런데 1922년 여름에 뜻하지 않았던 일로 인하여 亭(정)을 인왕산 아래 등과정 옛터로 移建(이건)하였으니 이것이 오늘의 우리 黃鶴亭(황학정)이다. 돌이켜 보건대 나라 안에 그 많았던 射亭(사정)들이 갑오경장 이후 하나같이 空潑(공발)되었거늘 당시의 群賢(군현)이 어찌 동감으로 오직 우리 亭(정)만이 홀로 먼저 중흥되어 翼然(익연)히 설 것을 기약하였을 것인가?
斯道(사도)가 거의 전멸되는 날을 맞아 저 五雲亭(오운정) 이하 다섯 射亭(사정)의 계통이 일시에 風嘯亭(풍소정) 하나로 叢翠(총취(다모임)) 되었으며 또한 이때에 風嘯亭(풍소정)마저도 廢亭(폐정)되려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우리 정이 이를 계승하여 궐기하였으니 어찌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재주도 없으면서 射友(사우)들의 뒤를 追隨(추수)해 다니다가 갑신년 여름에 등룡정에 入射(입사)한 이래 사계에서 세월을 보내며 몸으로 겪은 일이란 게 족히 枚擧(매거)할 만한 것이 없는 처지이거니와 이 亭(정)에서 從事(종사)한 지가 또한 居然(거연) 30년에 이르렀는데 요행으로 諸君子(제군자)의 寄託(기탁)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白壽(백수)의 나이에 이르러 허물을 얻는 바를 면할 수 있게 된 것을 그저 마음속으로 自慰(자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금 늙은 버드나무에 꿈치가 생기고 霧花(무화)가 눈앞을 어지럽혀 장차 활을 접어 벽상에 걸고 들창문 아래에서 병을 요양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스러운 바인데 혹시 후래의 群英(군영)으로서 이 亭(정)에 오르는 이들이 우리亭(정)의 연혁과 더불어 무릇 인사들에게 있어 학문의 연원과 藝技(예기)의 계통이 이와 같이 심원함을 깊이 살필 겨를이 없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고 또한 우리의 先師諸公(선사제공)이 腐心(부심)하며 授受(수수)한 도리가 오로지 沿革(연혁)의 끝에서 그 근성을 잊지 아니하고 소멸되고 자람에 성하고 衰落(쇠락)하는 사이에서 그 源統(원통)을 잃지 아니하는 데에 두고 있었으므로 斯界(사계)에 오늘이 있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고로 스스로 외람되고 고루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옛 소문과 목격한 바 大槪(대개)를 略述(약술)하여 傳誦(전송)할 따름인데 이를 輪奐(윤환)히 保守(보수)하고 더욱 빛나게 하며 예술이 興(흥)하여 일어나 接武(접무(궁사들이 연접하여 이어짐))하듯 발길이 이어지고 계속하여 찾아오는 士君子(사군자)로 촉망이 무궁케 된다면 두려움이 없겠다.
戊辰年(무진년(1928年년)) 菊月 下浣(국월 하완)
昌寧后人 成 文 永 識(창녕후인 성 문 영 지)